엠파스 뉴스중에서..

2007. 4. 6. 23:08★알리고 싶어잉. ★


삐삐를 사랑하는 모임 "설렘과 여유, 그 맛 못잊어"



휴대전화 가입자수 4000만 명. 손바닥만한 것 하나면 통화는 물론이고 뉴스 시청에 영화감상까지 웬만한 것이 해결되는 세상. 그런데 아직까지 '삐삐 타령'이라니. 아무리 '느림의 미학'이 소중한 시대라지만 시대에 눈 감고 사는 게 아닐까.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있다. 그 숫자만도 2600여 명이다. '삐삐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http://cafe.daum.net/ilovebeeper)' 회원들이다. 약칭 '삐사모'는 우리나라의 유일한 삐삐 동호회다. 회원들의 연령대는 다양하다. 삐삐가 뭔지도 모르는 10대에서부터 중년층까지 아우른다. 가입 동기 역시 여러가지다. 대개는 삐삐에서 느끼는 향수, 휴대전화에 대한 염증 등이다. 어린 동호회원들 가운데는 삐삐라는 물건이 신기해서 들어오는 경우도 있다.

삐사모의 운영자는 올해 서른둘의 강동욱 씨. 강 씨는 모교인 부산외국어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현직 교사다. 지난 1996년 대학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삐삐를 사용하고 있다. 강 씨가 삐삐를 고집했던 이유는 설렘 때문이다. "삐삐에 모르는 전화번호가 찍혔을 때 과연 누구 전화를 했을까 생각하는 시간이 아주 즐겁지 않습니까. 이건 상대 연락처가 다 뜨는 휴대전화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강 씨도 연락이 힘들다는 주위의 끊임없는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삐삐를 살려둔 채 지난 2004년 휴대전화족에 합류했다. 제 한몸 좋은 기분 내자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다는 판단에서다. 그렇지만 강 씨는 지금도 휴대전화 발신자 표시는 이용하지 않고 있다. 누구일까 하는 설렘을 여전히 놓치고 싶지 않은 까닭이다.

강 씨처럼 삐사모 회원들 중 순수하게 삐삐만을 사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속도 만능에 빠진 우리 사회가 그것을 용인해 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호회 이름도 '삐삐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삐삐를 개통하고 안하고는 관계없다. 다만 삐삐가 주는 그 여유로움을 찾는 사람이면 된다. 지난 1999년 발족된 삐사모의 전신은 '삐삐가 폰보다 좋아요(삐폰조)'였다. 이 때는 삐삐 외에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으면 가입이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현실적으로 삐삐만으로 생활이 불가능해 휴대전화 소유와 관계없이 삐삐에 대한 애정만 있으면 가입이 허용된다.

채준원(27) 씨는 업무성격상 삐삐를 산 경우다. 본사가 부산이지만 경영컨설팅을 하는 그는 전국을 다니다 보니 걸려 오는 전화를 놓치는 경우가 많았다. 때로는 업무지시를 못받아 일처리가 안되는 수도 있었다. 채 씨는 삐삐 음성사서함을 이용, 중요한 지시사항을 점검한다. 그렇지만 그것만이 삐삐를 사용하는 이유는 아니다. "휴대전화는 받는 사람의 처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직 거는 사람만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싫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는 김정삼(26) 씨는 올해 삐삐를 개통했다. 그냥 예전에 사용했던 삐삐에 대한 생각이 절실해서다. 삐삐를 가진 가까운 친구가 한 명도 없는 탓에 불편하기 그지없다. 그렇지만 김 씨는 한 번씩 해주는 친구의 호출이 좋기만 하다.


우성호(36) 씨는 최근 삐삐 사용을 잠시 중단했지만 꾸준한 삐삐 마니아다. 엑스트라 일을 하다보니 휴대전화를 받기 힘들어 삐삐를 즐겨 사용했다. 우 씨는 지난 1991년에 산 삐삐를 요즘도 수시로 분해하고 닦아 관리해준다. 우 씨가 보는 삐삐의 매력은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휴대전화는 건 사람의 번호가 뜨니 솔직히 안받을 수가 없죠. 그러나 삐삐는 번호만 뜨니 걸든 안걸든 제가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이 좋습니다."

이전에 삐삐를 사용한 적이 없는 20대 회원들이 동호회에 들어온 것은 휴대전화의 비인간성에 질린 경우다.

휴대전화가 주는 구속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대학생 최지선(21) 씨는 얼마전 삐삐를 선물로 받았다. 곧 개통을 앞두고 있다. "어디엘 가더라도 휴대전화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너무 싫었어요. 조만간 삐삐에 익숙해지면 아예 휴대전화를 없애려고 해요."

하지만 이런 열정과는 달리 삐사모의 앞길을 만만치 않다. 이들의 가장 큰 고민은 삐삐가 통신수단으로서의 기능을 사실상 상실했다는 데 있다. 회장 강 씨만해도 언론기관의 취재협조 등을 뺀 순수한 호출은 일년에 다섯번을 채 넘지 못한다. 삐삐를 개통한 사람도 3개월이 고비다. 한 번도 울리지 않는 삐삐를 하염없이 바라보다 3개월 정도가 되면 제풀에 지쳐 해지를 하고 만다. 그래서 회원들은 서로 호출을 해주면서 이 위기를 넘긴다.

이들의 바람은 한결같다. 많은 사람이 삐삐를 사용했으면 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구속 대신 여유로움이 있기 때문이다.

"약속을 예로 들어볼까요. 과거에는 약속은 꼭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습니다. 휴대전화가 없을 때는 약속장소로 가는 중간에 바꿀 수가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지금은 얼마든지 휴대전화로 핑계를 댈 수 있게 됐습니다. 만남이 일회성이 되어 버린 거죠. 이건 좋은 게 아니지 않습니까."(강동욱 씨)